30년만에 결속된 대화

1926년 늦가을, 때이른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였다.

화성의숙의 최동오숙장방에서는 15살의 김일성주석과 숙장사이에 심각한 대화가 진행되고있었다.

숙장은 사내가 한번 뜻을 품었으면 그만이지 중퇴를 하다니 될말인가고 하면서 의숙의 교육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중퇴하겠다는데 이 어수선한 세월에 만사람의 구미를 다 맞출수 있는 그런 학교가 어디 있는가고 말하였다.

방금전에 화성의숙을 중퇴하고 길림으로 가서 중학교를 다니겠다는 그이의 결심을 들은 숙장은 노여움을 타면서 한참이나 섭섭한  말을 하더니 창가로 돌아서서 눈내리는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는것이였다.

그이께서는 스승의  심정이 그대로 안겨와 괴로우시였다. 하지만 결심을 철회하실수 없었다. 그것은  오랜 심리적 곡절끝에 심사숙고하여 내리신 결심이였다. 길림으로 가실것을 결심하신것은 혁명의 앞길을 내다보시고 화전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터치고 보다 광활한 무대에로 나가 이미 조직하신 타도제국주의동맹의 강령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본격적으로 벌리시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숙장은  숨막힌듯 한 정적을 깨뜨리며 눈 내리는 하늘가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채 말하였다.

《성주와 같은 수재들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학교라면 나도  이 의숙에서 물러가겠네.》

뜻밖의 말에 그이께서는 묵묵히 서계시였다. 자신께서  택하신 길이 옳다는것은 시간과 실천만이 증명할수 있다고 생각하시였다.

제자의 결심을 돌려세울수 없다는것을 알게 된 숙장은 스승으로서의 아량과 자제력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이의 어깨우에 조용히 손을 얹었다.

《조선을 독립시키는 주의라면 나는 민족주의건, 공산주의건 상관하지 않겠네.  아무튼 꼭 성공하게.》

숙장은 운동장에 나와서도 퍼그나 오랜 시간 생활에서  교훈으로 될 좋은 말을 많이 해주었다.

그이께서도 작별의 시각 스승에게 하고싶은 말씀이 많으시였다. 하지만 괴로움을 묵새기며 참으시였다. 스승의 불만과 몰리해가 안타깝기만 하시였다.

스승과 제자의 그날의 대화는 이렇게 끝을 보지 못한채 끝나고말았다.

그이께서는 끝내 화성의숙을 떠나시였으며 그후 단 한번도 이날의 용단을 후회하시지 않았다. 두고두고 후회하신것이 있다면 폭설속에서 떠나가는 제자를 바래주던 스승의 어깨우에 내려 쌓이는 눈을 털어주시지 못한것이였다.

그날의 스승과 제자의 작별은 그렇듯 가슴미여지는것이였으나 30년후에 이루어진 상봉은 더없이 감격스러운것이였다.

남조선에서 살던 지난날 화성의숙의 숙장이였던 최동오선생은 조국해방전쟁시기 (1950.6.25-1953.7.27) 공화국북반부에 들어와 국가기관의 중요직책에서 일하며 생활하였다. 선생은 1950년대 중엽에 김일성주석을 만나 뵙게 되였다. 그때는 주석께서 화전에서 추켜드시였던 《ㅌ.ㄷ》의 리념이 미, 일 두 제국주의를 타승한 조국땅에서 현실로 된 때였다.

접견석상에서 옛 스승은 결국 그때 성주수상이 정당했습니다라고 말씀드리였다.

로스승의 그 짤막한 말로 30년전 화성의숙에서 있었던 심각한 대화가 결속된셈이였다.